정재현은 원래 좀 유치하다. 있는 집 외동아들, 빵 한 쪽 나눠 먹을 일 없는 삶. 존잘남에 무던한 성격, 공부 잘 하고 운동 잘 해... 그런 걸 죄다 타고난 본인이 존나게 좋았다. 그 중 하나만 쥐고 태어났어도 부러움을 살 만한 인생인데, 어떻게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태어났지. 이런이런, 게다가 피부도 좋고 키도 컸다. 편식도 안 하고 치아도...
옷깃이 스쳤다. 거의 삼 일만의 일이었다. 김도영은 빨래더미를 안고 베란다로 가고 있었고, 정재현은 물을 마시겠답시고 주방에서 알짱대고 있었다. 둘 사이 공기는 투명하게 어색했다. 사실 김도영이 정재현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더 맞았다. 이유는, 정재현이 너무 싫어했으니까. 지금도 옷깃 스치기가 무섭게 상체를 뒤틀기까지 했다. "나 나갈 거야." 그래서 이...
담비는 야행성 동물이다. 밤만 되면 희한하게 눈이 말똥해지고, 마구잡이로 뜀박질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성질을 타고 났다. 제 아무리 규칙적인 생활에 모범생을 자처하는 도영일지라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따라서 아침 운동은 그의 일상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눈 뜨기 무섭게 지난 밤 쌓인 에너지를 마음껏 소비해야만, 그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한 살 터울의 형이 있고, 사이 좋은 부모님 아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김도영. 그리고, 초코맛 아이스크림으로 싸울 일 없는 외동아들에 자상하지만 엄격한 부모님을 가진 정재현. 애가 조기교육이 되어서 그런지 둘 중 외로움을 타는 쪽은 의외로 김도영이었다. 어딜 가나 누굴 꼭 끼고 다녀야 했고, 혼자 남겨지는 걸 싫어...
도영에게는 꿈이 있다. 예쁜 초식동물을 만나, 멋지고 든든한 남편이 되어주는 꿈. '나는 훌륭한 아빠가 될 거야. 이왕이면 토끼나 햄스터같은... 털이 부드럽고 예쁜 친구를 만나 결혼을 해야지. 햇살 좋은 날에는 네잎 클로버를 찾아 주고, 몰래 고소한 산나물도 캐다 줄 거야. 햄스터라면 해바라기씨도 따다 줘야 겠다. 얼마나 귀여울까? 엄청 작고 소중하겠지....
고민. 마음속으로 애를 태우고 괴로워하다. 대체 김도영은 무엇이 애가 타고, 무엇이 그리 괴로워 마지 않는 것일까. 불알친구 정재현을 좋아하게 되어 버려서? 그게 혼란스러워서, 아니면 걔랑 뭐라도 하고 싶어서? 고백을 하고, 친구 아닌 연인이 되고, 시덥잖은 논쟁이 아닌 사랑 싸움을 하고, 장난 같은 몸싸움이 아닌 스킨쉽을 하고... 그런 게 죄다 현실적으...
김도영이 정재현을 만난 건 돌잔치 이주 뒤였다. 아버지들끼리는 대학교 동문에, 엄마들끼리는 고등학교 동창. 정재현 부모님이 서로를 알게 된 것도 김도영 부모님 결혼식에서였다. 어쩌다 보니 사는 동네도 같았고, 사업도 업종은 달랐지만 비슷한 종목을 했었고. 명절, 휴가, 공휴일까지 모두 같이 보냈으니... 그게 아니더라도 둘은 매일 얼굴을 봤다. 누가 보면 ...
돕멜 웹진 <Risky target> 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오전 여섯 시. 희미하게 굴러가는 리어카 소리로 하루가 시작된다. 알람도 없고 방송도 없지만 눈은 떠진다. 팔팔이칠 김도영이 제일 신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형님들, 기상이셔요." 봄날 황사 바람에 자비 없이 창문 열어 제끼는 빡최는 삼 호 꼬붕이다. 최소 삼 호 안에서 쉰 여섯 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야."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볼을 기댔다. 맨질한 유리 위에 뜨끈한 김이 서렸다. 반 쯤 짓눌린 시야에는 구겨져버린 산리오 편지지가 돌아다녔다. 이것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떡하지. 옛날에 주희한테 편지 쓴다고 묶음으로 사 뒀던 건데 이딴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귀퉁이에 강제로 미간 구겨진 폼폼푸린이 한숨을 쉰다. 물론 진짜 출처는 쪽 내민 김도영 입술이었다. 이십 년 넘은 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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