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정재현의 필살기는 묵묵함이다. 어떠한 야망이나 간절함 없이 고학력 글래머 존잘남, 이른 바 알파메일의 3조건을 모조리 섭렵할 수 있었던 그만의 비법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근성」. 만약 정재현에게 이 근성이 없었더라면 고학력은 무슨 배달의민족 천생연분을 인생 최대 업적으로 여겨가며 근성장 대신 메이플 스토리 만렙에 사활을 걸고 있지 않았을까. 왜냐면...
90. 골이 울린다. 커다란 말뚝을 관자놀이에 직통으로 꽂은 것 같다. 그대로 냅둬 주는 것도 아니고 일 초마다 한 번씩 자리를 옮겨 박는 감각이 든다. 도영은 최대한 대가리가 덜 깨질 것 같은 자세를 찾고자 몸을 들썩거렸다. 누군가 두통의 원인은 좆창난 자세 및 근육의 긴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뿜어져 나오는 숨 냄새를 맡아보니 이번엔 정설을 빗겨나간 ...
82. 정재현은 포기가 빠르다. 미련이 없다. 맞으면 맞는 대로 틀리면 틀린 대로. 굳이 떼써가며 오답을 정답이라 우기지 않는다. 혹자는 이러한 제 성향을 두고 간절함이 없다느니, 배가 불렀다느니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썩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내심 그런 생각이 든다. 어쨌든 출제자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데 내가 뭐라고 정정...
73. "여기 과카몰리 칩 하나랑요, 어… 치즈 프라이도 하나 주시고요. 치킨 롤타코 두 개랑 까르니따스…" 많이도 시키네. 누구 배 터뜨려 죽일 일 있나. 도영은 꼰 다리를 까딱이며 휴대폰을 두드렸다. 뭘 보는 건 아니고 정말 의미 없이 터치만 하는 거였다. 혼자 신중한 승준은 메뉴판을 붙들고 낑낑 용을 쓰고 있었다. 길어지는 오더에 무릎을 세워 앉은 ...
61. 쿵쿵. 계세요. 쿵쿵쿵. 저기요 총각. 쿵쿵쿵쿵. 좀 일어나 봐요. 쿵쿵쿵쿵쿵쿵쿵… "… 예. 예?" 어이쿠. 실눈의 재현은 기립했다. 가림막을 내려 둔 창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뭐야. 누구야. 사방을 오가던 머리통이 조수석 쪽에서 정지한다. 남색 모자를 뒤집어쓴 노년의 남성 하나. 팔뚝엔 경비 완장이 매여 있다. "무슨 일이세요?" ...
51. 남남 사이에 친구 없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확립된 김도영 인생의 진리였다. 동기든 선배든 후배든 친구의 친구든 뭐든 간에. 김도영을 '벗'으로 보기는커녕 벗기려만 드는 탓에 도영은 참 피곤했다. 외롭기도 했다. 고등학생 땐 나름 전교 부회장에, 대학시절엔 과대까지 했었는데 찐친이라 할 만한 것들이 0에 수렴한다. 현재 통화 중에 있는 강현수 군도...
40. 띠디디. 띠디디. 아침이 밝았습니다. 헬창은 고개를 들어 벤치프레스를 선점하세요. 띠디디. 띠디디. 아침이 밝았습니다. 헬창은 고개를 들어 벤치프레스를… 쾅. 침실 문이 부서져라 개방됐다. 웬일로 주인 놈이 일어나지를 않나 했더니만 진작 다른 곳에 가 있었나 보다. 이 양반, 오늘따라 표정이 구린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심술이 나셨길래 문짝을 부...
31. 나 헤어질래. 잔인한 설거지 현장이다. 컵들의 뱃속을 자비 없이 들쑤시는 고무장갑. 내장처럼 삐져나온 자몽 건더기들. 현장을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거센 물줄기와 그들을 표정 없이 응시하는 냉혈한 김 사장님. 쨍그랑!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컵 하나가 운명을 달리했다. 무시무시한 김 사장은 수세미를 더욱 빡빡. 문질렀다. "깨지면 또 새로 사면 되지. ...
21. 간만에 한가로운 일요일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진정 주말 다운 주말. 이런 날에는 점심 메뉴가 중요하다. 자극적인 배달 음식보다는, 지난 일주일을 견뎌내 준 나를 위해 요리를 해보는 건 어떨까. 밥 먹고 난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러 가야겠다. 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간식거리도 좀 샀다가… 필름 카메라로 화창한 가을을 기록하긴 무슨. 재현은 심드렁하...
15. 빼꼼 열린 드레스 룸 문틈 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이곳은 성수동에 위치한 도시형 생활주택 8층 5호. 앞머리 끝이 촉촉하게 젖은 남성 하나가 다섯 벌이나 되는 니트를 동시에 들고 서 있다. 그의 이름은 김도영. 특이사항은 게이. 어제까지만 해도 남친이랑 헤어질까 말까를 서른여섯 번 고민했음. 그러나 지금은 몹시 들떠있다. 이유는? 오늘은 사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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