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스필드, 인구 수 이만명을 웃도는 고요하고 넓은 땅덩이. 사실 열 일곱 한국 청소년이 적응하기란 퍽 버거운 도시다. 처음 코네티컷으로 간다고 했을 때는 막연하게 상상했다. 롱 아일랜드 해협을 바라보는 열 일곱의 거친 청춘, 그걸 위로하는 잔잔한 바닷가. 하지만 허락된 환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알고보니 맨스필드에서 롱 아일랜드 보러 가려면 가장 가까운 뉴런...
김도영은 운이 좋았다. 돈만 많으면 살기 좋은 대한민국에서 ‘돈 많은 사람’을 부모로 두고 있었고, 애기 때는 온 세상 사람들이 집 주변에 연못을 한 개씩은 끼고 사는 줄 알았으니 재수 없게도 유복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연못이란 한강이다. 어쩌면 연못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다. 한강은 김도영이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쩌면 유일한 야...
아무것도 못 하는 병, 멍청이 병. 김도영이 우울증에게 부여한 또 다른 이름이다. 1n년간 몸소 체험해 본 바로는 그랬다. 뭣 모를 때는 종일 뚝뚝 울고 슬퍼 죽겠는 게 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우울증. 이름과는 다르게 우울과는 괴리가 있었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도 그다지 슬픈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녀석은 생...
정재현의 하루는 바쁘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출근, 오픈 시간인 여덟 시까지 발주한 물건을 정리한 뒤 쿠키 반죽을 오븐에 넣는다. 고소하게 밀가루 익는 냄새를 맡으며 음악을 틀고, 바닥과 테이블을 정리하고. 여덟 시 반이 되면 영업을 시작한다. 테이크 아웃이 주가 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종종 출근길에 커피와 쿠키를 사 가는 손님들이 있기는 했다. 옆 가게...
불문율이 깨졌다. 김도영이 무려 대낮,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인상을 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당황과 황당을 제외한 그의 모든 감정 표현은 웬만해선 홀로 있는 집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김도영이 모자까지 벗어 던진 채로 사람들 빼곡한 버스에서 어깨를 씩씩대고 있다니. 사건의 발단은 인디고 전담 성 대리의 메시지였다. 따지고 보면 그의 잘못은 ...
인디고는 김도영의 학창 시절 별명이다. 평범하게 반 친구를 짝사랑하던 열다섯 김도영의 일기장이 들통났고, 인디고, 남색. 그 애의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로 김도영은 인디고가 됐다. 중딩 별명 수준 치곤 꽤 센스 있고 직관적인 언어유희다. 이거 완전 펀치라인 아님?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쇼미 나갔으면 합격 목걸이는 걍 받아왔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
김도영의 시야는 반쪽이다. 좌우가 아닌, 상하로 나뉜 세계. 이번에 새로 구매한 모자는 챙이 좀 넓으니까 반쪽보다는 삼 분의 일 쪽 정도라고 해야 하나. 도영은 매일 모자를 쓰고 다닌다. 원래는 캡 모자를 주로 사용했으나 유행이 바뀐 뒤로는 까만색의 버킷 햇으로 바꾸었다. 시중에 나와있는 모델 중 가장 챙이 깊고 넓은 것으로, 그가 그나마 고개를 들고 다닐...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당연했다. 시간은 오밤중이고, 둘은 헤어졌고. 한 달 만에 갑자기 연락하는 전남친 전화를 일일히 받아 줄 만큼 김도영은 그리 아량 넓은 사람이 아니다. 그 예민하고 급한 성격에 그간 정재현 쓰레기짓 다 받아 준 걸로도 사실 과분했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 그랬다는 게 더 문제지만, 어차피 쓰레기인 거 한번 더 하기로 했다. 쓰레...
헉.헉. 도영은 턱끝까지 올라오는 숨을 가다듬으며 잠시 허리를 기울였다. 달리느라 쓰고있던 모자는 길바닥 위로 사라진지 오래였고, 쓰고있던 마스크도 알아서 벗어던진지 오래다. 현재 위치한 곳은 평촌역 이번 출구. 걷는거 싫어서 길바닥에 드러누웠던 상고일짱 김도영이 무려 십오분만에 명학역찍고 범계를 지나 평촌까지 돌파했다. 와 이정도면 체대도 그냥 들어가겠는...
"토끼." "왜." "뭔데." "뭐가." "삐졌어?" 내가? 아니? 내가 미쳤냐? 빽빽대는 도영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광광. 울렸다. 그래? 재현은 별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내 들고있던 휴대폰에 고개를 박았다. 동시에 양 팔까지 파닥거리며 유난떨던 김도영 표정이 썩어 문드러졌다. 존나 마음에 안 든다. 허구한 날 폰만 저러고 쳐다보고 있으면서, ...
맛있냐? 도영은 물었다. 왼 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 손으로는 포크를 들이 밀면서. 포크에는 탱탱하고 빨간 떡볶이가 한 줄 꽂혀 있다. 응. 맛있어. 맞은편에 앉은 정재현이 좋다고 입을 벌렸다. 얌. 도톰한 핑크빛 입술 새로 윤기나는 떡볶이가 물리고, 히히. 정재현이 웃는다. 예쁘기도 하지. 입가에 묻어있는 빨간 소스, 그리고 그 옆에 폭 들어간 보조개....
잠깐. 튄다고? 정재현 족치겠답시고 안양 바닥에 신림 애들까지 호출 해 놓고, 화풀이로 애먼 꼬마돌까지 죽사발 낸 김도영이 갑자기 튀겠다고? 여기서 잠깐 정지. 우리는 다시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사하라 잃은 김도영이 아마스빈 옆골목에서 금영공고 꼬마돌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던 그 시점으로. 김도영 주특기는 싸커킥이다. 싸움할 때마다 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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